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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사연

돈을 빌리기 위해 故 정주영 회장이 500원 지폐를 보여주며 한 이야기

by 인생명언 2021.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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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중공업이 건조한 세계 최대크기의 컨테이너 선 / 삼성중공업

선박 운송은 항공이나 육상에 비해 큰 동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한 번에 많은 양의 물류를 이동할 수 있는데요.

 

현재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1위의 조선 강국으로 한국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글로벌 조선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나라 이기도합니다.

 

사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조선의 불모지였는데요.

그 분야에 뛰어들어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남기며 대한민국 조선 산업 신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이 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의 주인공 현대그룹 故 정주영 회장입니다.

 

조선업의 불모지 대한민국

참고자료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선박이 생산되고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은 조선의 불모지였습니다. 

 

소형 선박은 일본에, 대형 선박은 미국이나 노르웨이에 맡겨 생산하고 있었는데요.

 

1960년대 자체 기술로 화물선을 건조하면서 국내 조선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시작 단계였던 조선업 분야에 정주영 회장은 도전장을 내밉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정주영 회장에게 울산 미포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를 세우자는 의중을 비춥니다.

 

정주영 회장은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지만, 당시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었기에 조선 사업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보다 민생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과 함께 반대의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정부의 한 관계자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이 일이 성공하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올라가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현대 건설을 키운 정주영은 건설업을 통해 축적한 기술력이면 배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유럽으로 향하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 사진과 5만 분에 1 축적 지도 그리고 외국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 도면을 들고 유럽으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 사양화(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쇠퇴함) 되고 있는 유럽 조선 기술을 도입하고 차관 (돈을 빌리는 것)까지 받아 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는데요. 조선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쉽게 돈을 내어줄 리 없었습니다.

참고자료

당시 영국 최고의 은행이었던 바클레이스 은행과 4300만 달러 (당시 우리 돈 208억)에 가까운 차관을 협의하였으나 단번에 거절당하고 맙니다.

 

대한민국이 조선업을 한다는 것은 자전거를 만드는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을 정도로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인데요.

 

지속된 투자유치 실패에 포기할 만도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소문 끝에 바클레이스 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인 선박 컨설팅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갑니다. 그의 추천서를 받으면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요.

 

하지만 롱바텀 회장도 단칼에 거절하게 됩니다.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다

500원 지폐

정주영 회장은 단칼에 거절을 당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하는데요.

 

지갑 안에 있던 당시 500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을 보여줍니다. 지폐 뒷면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거북선 그려져 있었는데요.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역사의 한 과정에서 근대 공업화에는 뒤처져 있지만 우리 민족은 엄청난 잠재 능력과 역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들은 롱바텀 회장은 바로 추천서를 써주게 됩니다. 이제 영국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난관이 있었는데요.

 

지도와 사진을 가지고 선박을 수주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는 영국 수출 신용보증국의 보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보증을 요청했지만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어도 배를 사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의사를 내비치며 배 수주를 받아오면 차관을 제공한다는 입장을 내놓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롱바텀 회장으로부터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썬엔터프라이즈 사의 리바노스 회장이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게 됩니다.

참고자료

오나시스와 리바노스는 세계 해운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세계 해운 시장을 주무르던 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바노스 회장을 찾아간 정주영은 가져간 5만 분의 1 지도와 울산 미포만의 사진을 내밀며 "당신이 배를 사주면, 은행에서 차관을 받아 조선소를 짓고 당신의 배를 만들어 주겠다"라고 이야기 했다고 하는데요.

 

난관이 예상되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유조선 2척을 수주하게 됩니다.

 

당시 정주영은 "리바노스는 나보다 더 미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는데요. 아마도 세계적인 인물인 만큼 정주영의  패기와 도전 정신을 높게 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배를 수주하게 된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였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을 내 걸었기 때문인데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다면 원금을 다 돌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 리바노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훗날 리바노스 회장은 "만나서 이야기 해보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뿐이다"라며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 수주를 한 이유를 이와 같이 밝혔습니다.

 

결국 차관을 받아낸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 건축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이제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조선소가 없이 맨땅에서 선박을 만든다?

조선소를 지어본 적 없는 대한민국에 조선소 착공이 이루어지자 온 세상의 관심이 대한민국으로 집중되게 됩니다.

 

1972년 3월 당시 8,000만 달러를 투입하는 대규모 착공식을 갖게 됩니다.

 

당시 기한 내에 배를 전달해야 하는 입장으로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정주영은 조선소는 따로 짓고 배는 밖에서 따로 만드는 것을 생각했는데요.

 

보통 배를 만들 때 배를 띄울 수 있는 일종의 웅덩이인 독(dock)을 만들지만 시일이 촉박했기에 독(dock)의 시멘트가 마르기 시작하면서 바로 선박 건조를 시작합니다. 조선소와 선박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죠.

 

기업의 장비들 중 다른 곳에 꼭 필요한 장비들을 제외한 모든 기구와 장비들을 조선소 건축과 선박 제작에 투입했습니다.

 

매일 2,200여 명의 인부가 투입되었으며 모든 직원이 구두끈을 풀지 않고 잠만 자며 일할 정도로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하게 됩니다.

"잠 다자고 어느 세월에 선진국 따라잡나?"

 

정주영은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조선소 일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요.

 

당시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고속도로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새벽에 고속도로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올 정도로 시간을 금쪽같이 썼다고 합니다.

 

세계 유일무이한 선박 건조 신화

1974년 현대 조선 중공업의 준공식이 열리게 됩니다. 

 

선박 수주자인 리바노스 회장을 비롯하여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리나라 1호 초대형 선박인 '애틀란틱 배런'을 성공적으로 물에 띄우는 것에 성공합니다. 준공식은 세계로 생중계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애틀란틱 배런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지만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짓고 동시에 유조선 2척을 건조한 세계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요. 

 

1983년에 건조량 기존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라, 떠다니는 배 10척 중 7척을 대한민국에서 만들 정도로 한국 조선업의 위상과 브랜드의 가치는 상승하게 됩니다.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만든 정주영 회장의 패기와 도전정신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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